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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01 월 08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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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쪽 ㅣ 153 * 225 mm ㅣ ISBN:9788924059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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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 1. 漢四郡과 三國時代의 정치적 관계





    三國史記는 고려시대인 1145년에 완성되었다. 우리는 삼국사기를 통하여, 고려시대에 살았던 사람들과 그 이전 사람들의 고대사에 대한 인식을 이해할 수 있다. 이에, 삼국사기의 기록에 나타난, 漢四郡에 대한 고대사회의 살펴보고자 한다.
    서기전 108년 漢의 武帝가 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한사군은, 樂浪郡, 玄?郡, 臨屯郡, 眞番郡 등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낙랑군과 현토군에 대한 기록만이 남아있다. 고려시대 사람들에게 임둔군과 진번군은 전혀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사군 중의 낙랑군과 현토군에 대해서만 언급하였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현토와 낙랑의 위치 및 그 지역의 역사 적 위상 등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여’ 서술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현토와 낙랑에 대한 인식은, 한국사학계의 기존 소위 ‘통설’과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서기전 108년, 한무제가 낙랑군을 설치한 지역이 한반도가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현토군은 현재 중국 요령성의 의무려산 서쪽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현토와 낙랑에 대한 한중일 3국의 기존 ‘통설’과는 다른 ‘인식’이, 고려시대에 이미 존재했었음을 확인하였는데, 이런 확인이 그 나름의 성과라고 판단한다. 임찬경, 고려시대 한사군 인식에 대한 검토 -『삼국사기』의 현토와 낙랑 인식을 중심으로-, 國學硏究, 국학연구소, 2016.


    B.C. 108년에 설치된 漢四郡 가운데, 낙랑군의 소재지를 313년까지 지금의 평양 지역으로 국한시킨 견해가 정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三國史記에 등장하는 낙랑의 소재지를 충족시켜주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낙랑 관련 자료를 재검토해 보았다.
    평양 지역의 낙랑군은, 설치된 지 1세기가 지나서부터는 쇠약의 기미를 보였다. 이후 낙랑군의 존치와 폐치는 거듭되었다. 그리고 韓濊의 강성으로, 2세기 후반에는 낙랑군의 통제력이 급속히 이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고구려의 南進으로 인해, 평양 지역의 낙랑군은 압록강을 넘어서 안평 以北으로 이동하였다. 이렇게 성립한 요동의 낙랑군이, 대표성과 상징성을 함께 지니면서 帶方郡과 더불어 存置되었다.
    역대 중국 왕조에서 삼국 왕들에게 수여한 爵號에 樂浪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정도로 낙랑이 지닌 지배권적 명분은 지대했던 것이다. 그랬기에 요동에 存置된 낙랑은, 이후 폐지와 부활을 거듭하면서 6세기대까지 존속할 수 있었다.
    그런데 평양 지역의 낙랑군 주민 일부는 嶺西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백제의 동쪽에 소재하면서 신라까지 침공한 낙랑의 태 동이었다. 낙랑군의 分解를 읽을 수 있다. 영서 낙랑은 지금의 강원도 春川에 소재하였다. 이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문헌적 근거와 물증도 제기된다.
    4세기대에 접어들어, 요동의 樂浪郡과 帶方郡은 고구려의 집요한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前燕으로 歸附하고 말았다. 嶺西 樂浪 역시 고구려의 압박으로 인해 해체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嶺西 樂浪은 진번이나 임둔, 그리고 제1현도군과 마찬 가지로, 뚜렷한 고고학적 물증을 남겨놓지 못하였다. 이는, 앞으로 구명해야할 과제로 남아 있다. 이도학, 樂浪郡의 推移와 嶺西 地域 樂浪, 동아시아고대학, 동아시아고대학회, 2014.


    -하략-

저자소개

  • 저자 : 탁양현
    高句麗 대외정책과 中國系 亡命人의 정체성 인식을 고려하면서, 낙랑?대방지역 경영을 고찰한 것이다. 고구려는 4세기 초반 요동진출을 최종 목표로 삼아 대외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에, 313~314년 樂浪·帶方郡을 점령한 다음에도, 최소한의 국력만 투입해 이 지역을 경영했다. 그러다가 333~336년 前燕에 내분이 일어나자, 요동진출을 위한 토대를 다지는 한편, 다른 지역으로 진출하거나 지배력을 강화했다.
    이때 낙랑?대방지역에도, 대동강 북안에 平壤城을 축조해 지배거점을 마련하고, 지배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고구려는 342년 前燕에게 도성까지 함락당하는 위기를 맞은 이후, 전연의 침공이 예상되는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강화했다. 낙랑?대방지역에는 중국계 망명인을 대거 이주시켜 재지질서를 재편하면서 통치력을 강화했다.
    안악3호분의 被葬者인 ?壽도, 이때 이주되어 고구려의 통제 아래 세력기반을 마련했다. 다만 동수는 저승에서 만큼은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고 싶어 했다. 그는 중국왕조의 질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던 後漢-西晉代를 기준으로, 출신지를 표기하고 관작을 자칭하며, 이상적인 사후세계를 꿈꾸었다.
    350년대 이후, 전연이 북중국까지 진출하자, 고구려는 전연과 우호관계를 맺은 다음 남진정책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고구려는 전진기지인 낙랑?대방지역의 지배체제를 더욱 확고히 다져 나갔다. 이때 고구려는, 宰地세력이나 중국계 망명인에게 관등을 수여하며 준관인층으로 편입했다.
    덕흥리벽화고분의 被葬者인 鎭도, 그 중 한 명이다. 다만 鎭도 西晉代를 기준으로 이상적인 사후세계를 꿈꾸었다. 鎭의 관작도, 망명 이전에 역임한 하위직과 고구려로부터 수여받은 小大兄을 제외하면, 모두 이상적인 사후세계를 꿈꾸기 위해 자칭한 것에 불과했다. 여호규, 4세기 高句麗의 樂浪·帶方 경영과 中國系 亡命人의 정체성 인식,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학회, 2009.


    말갈의 실체적 연구를 위하여, 주요 주변국인 낙랑과 백제와 관계를 고찰하고, 낙랑과 백제 초기 도읍지를 토대로, 말갈의 위치를 새롭게 비정하고 고증하고자 했다. 그 동안 말갈연구는 단편적으로 이루어지거나, 오래된 고정관념에 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해관계에 따라 왜곡된 연구로 일관되어 왔다.
    주변국 중에서 말갈과 가장 많은 관계 기록을 갖고 있는, 백제와 말갈의 위치 고증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 관계 정립이 필요한 낙랑을 통해 말갈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낙랑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되는데, 첫 번째, 난하 동부 연안에 위치한 한사군의 낙랑군, 두 번째, 한반도 북부에 위치한 최리의 낙랑국, 세 번째, 낙랑국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하자,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 낙랑국 자리에 후한 광무제가 설치한 낙랑이 있다.
    이 중에서 말갈의 위치를 고증해 줄 수 있는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군으로 요서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백제는 말갈에 대응하기 위하여 성을 축성하고, 무기체계도 보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왕권강화를 통한 고대 국가로서 체제도 정비하였다.
    즉, 말갈과 전쟁을 수행하면서, 오히려 고대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중국사서에 표현한 것과 같이, 東夷 중에서 강력한 국가가 될 수 있었다. 또한 백제왕계가 고이왕계로 바뀌면서, 그렇게 싸우던 말갈하고 친화적인 정책으로 전환한다. 말갈도 추장이 좋은 말 열 필을 선물로 백 제왕에게 바친다. 그리고 고이왕은 고대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진다.
    고이왕계는 진씨 왕조로, 북방에서 내려온 말갈 계일 가능성이 높다. 말갈의 위치는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을 대전제로 해서, 三國史記의 기록과 중국사서 기록들을 종합하고 정황적인 근거를 통하여 비정하고 고증할 수 있었다.



    -하략-

목차

  • ▣ 목차 





    1. 漢四郡과 삼국시대의 정치적 관계  
    2. 百濟 王室의 起源  
    3. 新羅 왕실의 기원  
    4. 張保皐 해양 네트워크의 현대적 의미  
    5. 羅濟同盟의 정치적 의미  
    6. 통일신라의 반쪽짜리 통일  
    7. 百濟의 滅亡은 보수 탓인가 진보 탓인가  
    8. 白江戰爭과 倭軍의 戰略的 派兵  
    9. 佛敎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  
    10. 花郞徒의 정치적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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